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지음 / 천녀의 상상
1. 작가
주변에서 추천해줘서 읽었는데.... 참 단단한 작가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읽는 사람이 작가라는 말은 맞는 듯.
<모던하트> 한겨레문학상으로 등단.
2. 책 속에서+감상
“화형대에 묶였던 여성들과 나는 같은 지형의 다른 시간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를 인용한 정아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의 문장.
책에서 한 문장만 꼽으라면 단연 이 문장이다.
마녀사냥이 자본주의로 넘어오는 시기. 인클로져 운동으로 노동이 자본화 될 때. 남편의 노동이 돈벌이가 될 때, 아내는 노동을 재생산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노동력 재생산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거부한 여성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마녀사냥으로 해석했다.
이 해석으로 그렇게 오랜시간 광범위하게 많은 여성을 살해할 수 있었던 사회가 가까이 다가온다. 인클로져와 마녀사냥은 알지만 이해못할 광기였다. 나치즘보다 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오버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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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하고 정정하느라 이전에는 가보지 않았던 다양한 대륙에 발을 들려놓게 된다.”
대학시절, <창녀론>이란 책이 집에 있어서 읽었다가, 그 내용을 여성학 기말고사 레포트에 넣었다. 결국 D를 맞았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이 책에서 무엇을 놓쳤는지 깨달았다.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 직업적 창녀론을 썼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얻었던 점이라면, 반성없이 읽으면, 여성주의자가 창녀론을 주장하게 된다. 반드시 반대로 가서 부딪혀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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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노동에 임금을 부여하면 사회에 대대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일단 여성이 집에서 하는 일을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주부인 여성이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되고,
매일 수십 가지의 노동을 하면서도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해 영원히 사회적 약자로 머무는 상태에서도 벗어난다.
여성이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데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으면
아이를 키우기 위해 드는 돈을 국가가 보조해준다는 개념의 '복지 제도'가 직접적으로 실현된다.
그렇게 되면 앞서 예로 들었듯 아이를 키우는 저소득층 엄마가
국가에서 보조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세금을 축낸다고 (로이 F. 바우마이스터 같은 남성학자에게)
욕을 먹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해진다.”
일면 이해는 가지만, 드는 생각은 많은 기업들이 '나혼산'들을 위해 세 끼 밥을 다 주고 세탁소도 운영해주고 노동자의 가족보다 노동자 개인이 살기 쉽도록 보장한다. 가사노동을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개인 사회에서 문제는 인구감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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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초반에는 가사 노동에 임금을 지불한다는 개념에 거부감을 느꼈다.
아이와 남편을 위해 한 가사에 돈을 받는다고?
소소한 집안일에 돈을 청구한다는 개념이 낯설고 민망했다.
대체 누구에게 청구해야 한단 말인가?
실비아 페데리치는 이를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
아이가 어렸을 때, 옆집에 살던 은솔이네가 생각난다. 사랑으로(?) 결혼한 나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 남편에게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집안일은 언제나 전쟁이었다. 은솔이 엄마는 심플했다. 아이 키우는데 가정부 쓰고 밥 다 사서 먹는 것보다 나를 사용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면 생활비 250만원으로 나 없으면 아이는 절대 못 키울 거라며 당당했고, 그 남편에게 당당하게 휴일을 요구했다. 사랑과 헌신을 표방한 나의 가정은 불화투성이였지만 그녀의 집은 공존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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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전자본주의 체제(자급 자족, 물물교환, 길드 체제, 상부상조, 신분 사회 등등)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옮겨 올 때, 여성이라는 종족은 함께 옮겨 오지 않고 남겨졌다.
자본주의는 큰 폭의 이윤을 내기 위해 노동자라는 새로운 지위를 만들어내고 저임금으로 부리면서,
그 노동자를 무상으로 보필할 대상으로 여성을 지정했고,
그 역할을 여성이 받아 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라는 종족 전체를
자본주의 이전의 시공간에 남겨두어야 했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개념이 뚜렷하고,
일에 대한 보상을 화폐로 환산해서 받지 않으며,
감정 표출과 솔직함이 살아 있던 시대의 공간에.
그래서 여성은 남성의 밑에 있고, 하는 일에 대한 화폐 형태 의 보상을 받지 않으며,
애정과 슬픔을 표현하는 존재로 남았다.
감성과 배려로 노동에 지친 남성을 감싸 안는 존재로.
그렇다고 여성이 완전히 전자본주의적 시대에서 사는 것도 아니었다.
여성은 남성 노동자의 주변에 머물면서 가끔씩 자본주의의 시공간으로 편입해
남성보다 더한 저임금노동자로 기능하거나,
아주 드물게는 뛰어난 노동자가 되어 고임금을 받았다.
그러나 임금노 동자에 속했던 시간이 지나가면 재빨리 비자본주의적인 세상으로 추방되었다.“
국가가 가사노동을 인정하면 해결될까? 속시원한 말이지만 의구심이 드는 서글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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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치가 바라보는 최종 지점은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비자본주의적인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있을 것이다.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돈을 주어야만 얻는 세상에서,
돈으로 환산되지 않은 마지막 보루처럼 기능하는 여성의 무보수 노동을 임금노동으로 바꾸자고 외치는 것은
반자본주의 운동가이기도 한 그의 신념에 배치되는 전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데리치는 알고 있다.
사회변혁을 추동하는 사람은 때론 자신이 설정한 최종 목표와 색깔과 맞지 않을지라도
현실을 고려해 전격적으로 타협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본주의 체제하 이등 시민인 여성을
일등 시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은 세계시민주의를 꿈꾸던 일제 치하 식민지 조선인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잔혹한 통치에 신음하는 대다수 국민들을 위해
우선은 민족국가를 설립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본인들이 꿈꾸는 이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민족주의를 채택했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문제만 지적한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작은 도전과 실천만이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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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기혼이든 비혼이든 여성을 몽땅 다 '주부'로 설정한다.
그런데 현재 비혼이면서 전문직에 있는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이 지금 누리는 임금수준과 직위가 피라미드의 더 높은 층으로 올라가면
더 이상 지속되기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사회는 언젠가 주부가 될 이들에게 리더 자리를 맡기지 않으므로)
예상하지 못한다.
주부가 아닌 자신이 주부라 불리는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보지 못한다.
또한 이들은 생각하지 못한다.
타인의 자비심에 기대는 게 정작 누구인지.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남에게 기대는 존재라 생각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생각의 각도를 조금만 틀면 남성이 밖에 나가서 번듯한 명함을 갖고 돈을 벌며 사는 게 누구 덕분인지,
돈으로 환산받지 못하는 노동을 하며 어린이를 돌보고,
아픈 이를 보살피는 행위야말로 자비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경험치 밖의 일이어서,
또한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너무나 부당한 대우와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지평을 넓혀 들여다볼 수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설정한 성별 분업이 갈라놓은 것은 남녀 사이 연이 아니다.
여성은 반드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살림과 육아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는 정언명령은
그런 명령을 받아들인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도 갈라놓는다.
돈으로 환산되는 일만을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자본주의적 시각에 갇힌 한,
비혼 여성은 가정에서 살림과 육아를 도맡는 기혼 여성을 '의존적이고 답답하게 산다' 여기고,
기혼 여성은 비혼 여성을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비하하게 된다.
체제 유지를 위해 사회는 단일한 여성상,
곧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모습을 자꾸만 강조하고,
그 과정에서 그 여성상에 부합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자신이 선 자리를 옹호하면서 결과적으로
서로를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
나의 대학 시절 절친인 미선이와 멀어진 것도 이런 이유가 있다. 비혼과 기혼 사이의 멀어진 간극. 육아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같은 여성이라고 해서 쉬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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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새로운 사물과 사람을 만나면서 내면을 환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편협하고 정체된 인격을 가진다.
고정관념을 차곡차곡 쌓아 아집으로 굳히고, 내가 하는 방식만이 옳다 믿으며,
접해보지 않은 것은 무조건 ‘옳지 않은' 것이라 여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핵가족의 성곽을 수호하는 엄마와 그의 양육 아래 자라는 아이들,
가족 구성원이 소비할 재화를 기를 쓰고 획득해 와야 하는 아빠의 정신세계는 질식 상태에 이른다.”
평화로운 가정에 스며드는 위기는 이 모든 상황이 달라지는 은퇴와 관련이 있다. 반면 이런 것도 포기하는 아빠를 또 인정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역시 반대다. “이제 나는 나이들었으니 너가 나가서 발아라” 바꿔서 하자. 이런 말들도 무책임하다.
3. 나오며
읽기 어려운 책들을 성실하게 읽으며 성찰한 글에, 금기에 도전하는 여성들이 많아졌으면 하면서도, 그런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아이가 마주할 세상은 달랐으면 하면서도, 어느 자본주의국가보다 자본에 억눌린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