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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여자혼자떠나기_유럽편/여행전기록

여행이 필요한 순간

기루짱 2009. 1. 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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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만 해도 나에겐 아직 많은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가을, 믿었던 팀장이 떠나고 원치 않는 나의 팀장 자질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한 달 여 간 이사, 사장 등의 호출로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일이 계속 흘러갔으며 이에 미처 대처할 방향도 잡기 전에 팀 해체라는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정리가 되었다. 나를 둘러싼 상황은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두 달 만에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됐다. 그리고 나를 추스르기도 전에, 이제는 사건을 지켜본 주변 동료들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직장생활 7년차의 겨울은 그렇게 다가왔다.

여자 나이 서른 셋. 무언가 화려한 경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확실한 커리어가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직장인. 맡은 일을 열심히 해왔다고 자부했지만, 그런 이력은 사회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또 이것은 다른 회사로 옮겨봐야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동안 밀린 책 보고 영화 보면서 실컷 집에서 쉬고 싶었다. 그러자니 이번엔 결혼도 안 한 것이 직장마저 없다는 소릴 들을까봐 머리가 지끈했다. 물론 부모님이 하실 걱정도 걱정이시겠지만.
선택은 하나. 일도, 회사도, 집도 모두 떠날 수 있고, 지친 몸과 마음도 좀 쉴 수 있는 것.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스에 찌든 몸으로 뭔가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여행준비밖에는. 그래, 지금은 여행이 필요한 순간이다!

막상 여행을 가려고 보니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말은 안 통하고, 아는 사람은 없고, 낯선 곳에서 어디 가서 자고 어디 가서 무얼 먹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밤거리는 위험하지 않을까, 내가 잘 찾아갈 수 있는 곳일까, 이동은 어렵지 않을까?
어깨에 짊어지고 두 발로 걷을 때마다 느낄 가방의 무게까지(!)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꼭 가야 하는 걸까, 왜 거기까지 가야 할까, 그리고 이렇게까지 해서 가는 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돈은 좀 적게 드나.
그래도 차라리 이게 더 나았다. 회사 생각, 일 생각을 하는 것보다, 여행의 두려움을 걱정하는 것이 나았다. 파괴적으로 나를 소모시키기보다, 건설적인 두려움에 나를 내맡기는 것이 백 번 생각해도 나은 일이었다. 

일단 어디를 갈지 정해야 했다. 
 
마침 후배에게 구독하던 <트래비>라는 여행잡지가 있었다. 그동안은 바빠서 봉투도 안 뜯은 채 책상에 방치되어 었었다. 주로 여행지 소개와 패키지 여행상품에 대한 것이 많았다. 지하철을 오가며 짬짬이 뜯어보며 내가 직접 하고 싶은 게 뭔지, 뭐가 당기는지 체크해 뒀다.
보던 잡지 기사 중에, 겨울의 파리는 춥고 해가 짧으니 야간개장 하는 미술관을 이용하는 좋다는 내용의 기사, 파리의 유명한 서점들을 소개한 기사, 터키 카파도키아의 사진과 에드벌룬 투어 등의 기사 등이 실려 있었다.
이것을 보자 불현 듯 떠오르는 것. 파리에는 선배가 살고 있고, 터키에는 후배가 다녀왔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작정 연락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서점에 가서 책도 닥치는 대로 봤다. 만나는 친구에게도 여행을 가겠노라 이야기를 했다. 마침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무작정 여행 서적을 보는 중이라 했더니 생각외로 많은 책을 가져다 주었다. 그 중 하나. <카오산에서 만난 사람들> 표지를 여니 이런 말이 써 있었다.
"누구나 여행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그때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가방을 꾸리면 된다. 그때부터는 모든 일이 저절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여행준비는 저절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책, 잡지 등을 보다가 필요한 정보, 특히 관관청, 개장시간, 교통, 장소, 이름 등 필요한 것을 적어 두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전화해서 물어봤다. 이미 대학교 때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도 전화해서 ‘어땠어?’ 하고 물어봤다.

인터넷 사이트 가입도 시작했다.
각 지역마다 대표적인 사이트가 있다. 유럽여행은 네이버 카페 유랑, 터키 여행은 고터키.
확실하고 정확한 가격, 교통, 좋은 숙소, 맛집 등 중요한 정보는 여기 다 있다. 인터넷 대한민국! 질문을 하면 답도 해주고, 동행도 구할 수 있다. 세계 어딜 가더라도 인터넷만 되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책을 다 읽고 나자, 내가 바라는 여행은 어떤 것인지도 잡혔다.
김남희의 걷는 여행도 좋았지만, 많이 보고 부딪히며 피부에 와 닿는 것, 김훈규의 언더그라운드 이야기를 더욱 즐겨읽고 있었고, 카페, 클럽 보다는 미술관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고 있었다. 사진 여행으로 삼아 읽은 배두나의 런던 놀이는 던져버렸고, 김홍희의 방랑은 애틋하게 읽혔다. 무엇보다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순례'는 감동적이었다! 나도 그 그림이 보고 싶었고, 가보고 싶었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정보, 프로그램, 이벤트 혜택도 둘러보았다. 그러다 안 되면 전화도 하고, 직접 찾아가서 상담도 했다. 비용도 뽑아보고. 신발끈 여행사의 상담은 전체 노선을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러다보니 어느덧 루트가 결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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