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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 은유 본문

일상여행/읽으면서 책+삶 기록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 은유

기루짱 2023. 6. 6.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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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루 2023/01/08 22:19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 은유 / 서해문집

1. 저자 :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고 나서 무척 감명 깊었다.
 
다시 찾아보니, 그때 여러 책 열심히 읽었는데, 기억나는 게 별로 없네.
역시 기록이 중요하다. 
그때 왜 이렇게 대충 써놨을꼬.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와 <글쓰기의 최전선>을 보면서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대면강좌가 시작되자 마자 
'나도 작가다' 글쓰기 수업과 '나만의 특별한 말과 글' 강좌를 들었고,

 

'나만의 특별한 말과 글' 강의에서 은유 작가를 만났다. 
저자의 글쓰기 책이 아니라 저자의 에세이가 보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다. 

 

 
수유너머에서 공부했고, 읽다보니 서울여상을 졸업했다. 
굳이 대학을 가서 학벌세탁을 하지 않았고, 그대로 글쓰기 강사이자 글하청노동자로 살고 있다. 
나는 세탁한 사람인데. 

 

 
2. 목차 
 
저자의 말

1부. 여자라는 ‘본분’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는 말
여자들의 저녁식사
딸이니까
김제동의 말
본분과 전혜린
때로 엄마로 산다는 것은
눈물 속으로 들어가봐
밥 안 하는 엄마
자신이 한 일을 모르는 사람들
미친년 널뛴다는 말
여가부에서 온 우편물
꽃수레의 명언 노트
구닥다리 모성관의 소유자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앓으셨던 엄마
엄마와 수박
군인 엄마의 인생 수업

2부. 존재라는 ‘물음’ :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나는 오해될 것이다
오래 고통받은 사람은 알 것이다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다
그림을 걸지 않는 미술관처럼
양껏 오래 살고 싶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 대
결을 맞추는 시간
길에서 쓰다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사는 일은 가끔 외롭고 자주 괴롭고 문득 그립다
내 인생이 그렇게 슬프진 않거든요
세상에는 무수한 아픔이 있다
넓어져가는 소란을 위해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앵두와 물고기, 함께 있음의 존재론

3부. 사랑이라는 ‘의미’ :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다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사랑 절대로 하지 마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그대라는 대륙
그와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4부. 일이라는 ‘가치’ : 박카스 한 병 딸까요?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게 낫다
꽃 시절은 짧고 삶은 예상보다 오래다
버둥거리는 노동절 전야
박카스 한 병 딸까요?
남의 집 귀한 자식
바늘방석 같은 사랑
나는 울타리를 넘고 싶었다
말하는 누드모델
구름의 파수병
세상의 모든 처음은 얼마나 무서운가
그게 왜 궁금한 거죠?
살림만 미워했다
저자가 뭐라고
절판 기념회를 축하해도 되나요?
 
 
3. 책 속에서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애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 책은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는 한 여자의 투쟁의 기록이다. 모성을 수행하는 엄마이자 존재를 이행하는 자아라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조건 속에서 나는 분열했고, 분투했다.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아무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스스로를 탈고유화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라고 엘렌 식수가 말했던가. (중략) 내 거친 생각에 빛과 물을 부어준 귀한 인연들, 같이 시를 읽고 글을 쓰고 말을 나눠준 도반들, 이 책에는 그들의 체온과 지분이 들어있음을 말하고 싶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지는 모든 존재들의 '탈고유화'의 여정 위에 이 책을 내려놓는다. 
 
-여기까지 저자의 말 중에서.
시와 철학서를 넘나드는 온갖 인용을 보면서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이 됐다. 마음고생도. 한편으로 너무 힘이 들어간 거 아냐, 하면서 읽는 동안 힘이 점점 빠지는 것도 보인다. 딸의 힘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그렇다고 날이 무뎌졌다기 보다 익어가는 느낌이다. 
삶의 궤적이 비슷한 나보다 몇년 선배인데, 같은 나이대에 나보다 치열했다 싶다. 
 
나에게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이 물오르는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어쩌면 아이에게도 원초적인 불안이 있어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부모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원초적 불안. 성인이 되어 자기 한 몸 챙길 때까지는 이 세상 모든 아동들은 자기 유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지. 그러니 안쓰러운 어린 것에게 잘해주어야 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자주 힘에 부친다. 내심 잔인해진다. 이 분열적인 자아를 바라보아야 하기에 엄마로 사는 일은 쓸쓸하고 서러웁다. 
 
옆 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 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은 퇴화한 것이다. 무심함이 무뚝뚝함, 남자다움으로 미화된 데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안 가르쳐주니까 관 뚜껑 닫힐 때까지 모른다. 모르고 편하게 살다가 죽은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만큼 한평생 고생만 하다가 죽는 여자들도 많다. 
 
세월이 흐르고 성폭행 피해 여성들을 인터뷰할 때 물었다.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가 무어라고 말해주면 가장 좋은지.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힘들었겠구나. 나한테 얘기해줘서 고마워."
진실은 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듣는 데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니 집집마다 당도해야 할 것은 가해자의 신상 명세가 아닌, 피해자의 들릴 권리가 담긴 서툰 말이다. 
 
하지만 자동차나 보험회사 광고에 나오는 정상 가족의 판타지를 버리지 못하는 한, 엄마의 자리에서 늘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 (중략) 원초적 모성으로서의 엄니, 신문이 조종하는 대로 사고하고, 광고에 나오는 대로 욕망하는 엄마, 사회적 모성으로서의 엄마. 어떤 개념을 걸어도 '엄마'는 문화적 산물이고,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다. 
 
"차라리 양심거부를 할까?" 난 18개월을 감옥에서 보내는 병역거부가 '차라리'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며, 소신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속으로 저울질을 했다. 그래도 감옥보다 군대가 낫지 않을까...
한국에서 엄마로 사는 일은 괴롭다. 과열 경쟁을 조장하는 사교육을 반대한다면서도 아이는 수학학원에 집어넣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아이는 군대에 가라고 한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타협의 기술은 늘어간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부끄럽다. 
 
-여기까지 1부 여자라는 '본분'
 
원래 이별한 사람은 문법에 맞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 자본의 속도에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진짜 노동자. "로마는 노예의 쇠사슬로 묶여 있지만 임금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그 소유자에게 얽매여 있다"고 말할 때의 그 노동자. 자본의 메커니즘에서 하나의 부속으로 쉼 없이 돌아가는 똘똘이표 나사였다. 
 
동정이든 차별이든 그 아래 깔린 근본 생각은 다르지 않다는 걸. 어떤 대상을 자기 삶의 반경에 없는 분리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고아는 불쌍하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특정한 면만 부각시켜 인격화 하는 것(장애인은 무능하다), 자신은 결코 되지 않을 이질적인 대상으로 상대를 보는 것(공부 안 하면 노숙인 된다). 하나같이 타자화하는 말들이다.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큰소리 치는 이가 가장 사랑을 갈망하는 것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자의 뇌리엔 나이가 화인 처럼 찍혀 있음을 알았다.


-여기까지 2부 존재라는 '물음'

 

 
그렇다. 니체는 악행을 권한다. 속 좁은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악행을 저지르는 게 낫다고 한다. 행위의 과정에서 문제를 떠뜨리고 해결해주고 다른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다. 
 
어떤 직업은 노동의 결과물이 보존되고 과정의 수고로움이 기록된다. 존경과 동경을 받는다. 어떤 직업은 아니다. 노동의 성과가 사라지고 고충이 음소거된다. 
 
삶은 그 자체가 낭비다. 책 한권을 어렵사리 읽어도 돌아서면 내용을 까먹지 않던가. (중략) 사는 게 총체적 낭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 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여기까지는 4부 일이라는 '가치'
 
 
4. 한줄평

 

 

 

한겨레에 7년동안 연재하고 작년 마지막 글을 썼다고 SNS에서 봤다. 
어떤 글은 완전 나의 이야기 같기도 하고, 어떤 글은 속이 시원한 사이다였고, 어떤 글은 어려웠다. 나와 비슷하다 느끼다가도 아니라고 하는 탈고유화의 여정의 책이다. 
이런 글이 많아져야 한다. 내가 글을 쓰게 된다면 어떤 글을 쓰게 될까. 
쓰기부터 해야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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